우리 엄마는 학교에서 수백 명의 초등학생을 위한 밥을 짓습니다. 저는 날마다 메뉴를 골몰하며 요리하고요. 잘 나가는 식당의 주방에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주방 이모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손맛 좋은 요리사입니다.우리 엄마는 학교에서 수백 명의 초등학생을 위한 밥을 짓습니다. 저는 날마다 메뉴를 골몰하며 요리하고요. 잘 나가는 식당의 주방에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주방 이모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손맛 좋은 요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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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을 달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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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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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십오 년간 수천 명을 위한 요리를 해 온 박미경입니다.
두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육백 인분을 요리할 땐 기본적으로 재빨라야 하지만 배식할 때의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본격적으로 조리를 시작하기 전 동료들과 구체적인 조리 순서와 과정을 설계합니다.
간장에 졸인 두부 부침을 담당했을 때
두부가 으깨져 배식하기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든다는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급식이 어떤 학생에겐 하루의 유일한 영양 균형 잡힌 식사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맛있고 기분 좋은 한 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단체 급식에 맞는 새로운 조리법을
팀에 제안했습니다. 원래 두부 부침을 할 땐 기름 두른 철판에 자른 두부를 일일이 부쳤습니다.
썬 두부를 오븐에 익히면 수분이 빠져나가 두부가 단단해집니다.
적당히 쪼그라든 두부가 놓인 오븐 트레이에 양념을 붓고 졸여내어 완성했습니다.
오븐에서 조리하는 동안 다른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조리 시간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데 기여한
단체 급식에 적절한 조리법이었다는 동료의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두 번의 계약직을 거쳐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내 부모가 얻을 수 없었던 정규직 책상은 말끔했다. 인사팀 직원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법정 외 복리후생을 설명했고, 입사를 환영하는 선물을 건넸다. 정규직이 된 후 서핑 명소로 유명한 바다에 갔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 관해 물었을 때 당당하게 내 직업을 말했다.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을 때면 누구든 알아듣기 쉬운 용어를 써가며 설명했고 별거 아니라며 끝마쳤다. 회사에서 난 오래달리기 하기 전, 시작과 끝이 있는 트랙을 설렁설렁 달려보며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보는 정도였는데. 회사와 셰어하우스를 오가며 나의 위치를 점해보려다 실패한 나는 트랙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이탈했다.

 곧장 서울 밖 본가로 향했다. 남은 계약분의 월세를 내기 위해 단기 임시 일자리를 차지하려 애쓰고, 갑갑할 땐 밖을 걸었다. 아침 일찍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밭을 가는 이웃들을 지나치고, 땅 둘레에 심은 옥수수가 무럭무럭 커 속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오동통한 옥수수를 보며 저건 누가 다 먹을까, 하나 먹어볼 수는 없는지 누레지는 잎사귀를 보며 탐내다 보면 어느새 줄기째 잘려 있었다. 황량한 토지를 바라보며 내년이면 다시 영글겠지, 속으로 생각하며 아쉬운 눈빛으로 지나치는 걸 반복했다.

 삼 년 동안 두 번씩이나 고용노동청에 가 근로감독관 앞에서 내가 겪은 부당한 일을 진술했다. 신고 명목은 전부 근로계약서 미작성이지만 줄줄이 딸려 나오는 사연은 제각각이다. 근로감독관이 나 따위의 사연에 큰 시간을 쓰지 않기를 바라며 증빙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만으로 신고서를 작성했다. 모든 일이 끝날(일상을 살다 억울한 감정이 불쑥 튀어나오는 일이 잦아들) 때까지 벌벌 떨면서도 누군가 똑같은 일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텼다. 얻은 거 하나 없던 과정을 지나치며 엄마의 그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타인의 삶에 얼마나 개입해도 되는지 상한선을 찾아가 보면서.

 여전히 바깥을 천천히 걸으며 자라나는 것을 구경만 하는데 엄마는 묵묵히 매일 아침 서울 북부에 있는 학교로 출근했다. 미경의 경력은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혼자 하교하고 스스로 숙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꼬박 여덟 시간을 근무한 후 집으로 돌아온다. 이번엔 가족 먹일 밥을 짓고 각자 방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낸다. 엄마니깐 해내는 거라고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미친 굴레에서 미경은 계속 머물고 있었다.

 미경은 종종 어린 나에게 “민지네 학교에서도 누군가가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주잖아.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거야. 아이들을 보면 내 딸들이 떠오르거든.” 말했다. 점심시간에 반찬을 퍼주는 사람을 볼 때 그럼 이 사람의 자식도 다른 학교에서 밥을 먹고 있는지 궁금했다.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호기심을 가라앉히고 급식조리원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아이가 되려 노력했다. 엄마가 퇴근 후에 들려준 이런 이야기가 생각나서이다.

“맨날 퍼준 밥 다 먹고도 다시 받으러 오는 아이가 있어. 너무 많이 먹어서 좋을 건 없으니 더 달라고 해도 적당히 주고 보내거든.”, “교문 밖에서 날 알아보고 인사해주는 학생을 보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우리 엄마를 생각해 감사 인사를 크게 하거나 부끄러운 눈웃음을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배식받으며 무거워지는 식판에만 집중했다. 엄마도 멋지지 않은 하얀색 모자를 쓰고 소독약과 밥내가 섞인 냄새를 뒤집어쓰고 있을 걸 상상하면 조리사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급식실은 나에게 은폐의 공간이다. 아무도 우리 엄마가 급식조리원인 걸 몰랐으면 좋겠다고 오래도록 걱정했다.

 과거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해본다. “우리 엄마는 식품 위생 지식과 대량 조리 기술을 보유한 숙련 조리사이다.” 어떤 사업장에서든 십 년 이상을 근무해 관리직이 되었다는 말에 의아해할 사람은 없다. 십오 년을 근속한 엄마가 숙련 조리사라고 지금껏 생각한 적 없다는 사실은 나를 소름 돋게 한다. 급식을 비롯해 돌봄과 같은 여성 집중 직종을 둘러싸고 있는 ‘비숙련’에 대한 인식은 노동자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쳐, 자신들의 노동을 숙련노동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다정, 『밥 짓는 여자들』, 산지니, 2026) 급식 노동자를 비춘 책의 말은 내 마음에 적중했다. 미경은 크고 작은 화상을 입고도 병가를 쓰지 못했다. 자기가 빠지면 급식실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출근해도 괜찮다고 설득했고, 난 악착같음에 머리를 휘저었다. 내가 출근을 말리려 단호한 투로 말하고 그것도 안 통해 화를 내면, 그제야 얼마 전에 은퇴한 지인 급식 조리사에게 대신 근무해줄 수 있는지 전화해 묻겠다고 체념한다. 이제 와서야 본인의 노동이 쉽게 아무에게나 대체될 수 없음을 증언한 셈이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우리는 여성의 돌봄노동이 사회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해온 역사를 기억하는 증인이다.

 무엇을 위해 노동 시장에 나의 가치를 이렇게까지 증명하려 애쓰는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종종 느끼는 패배감, 허무감, 절망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를 갈고닦을 수 있는 시간과 배움 축적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내가 안고 사는 복잡함을 해석해 글로 쓸 수 있다면 조금 덜 억울할 거라고 소리 내 외친다.

 옥수수 알갱이를 잘 말리고 모으며 땅에 심을 시기를 기다렸다. 파종의 시기를 잘 지나쳤다고 믿으며, 남의 밭작물처럼 무럭무럭 잘 자라겠지 믿었는데 한 해의 농사를 다 망치고 말았다. 작황이 좋든 나쁘든 사람들은 땅을 다지는 계절이 되자 움츠렸던 몸을 움직였다. 나도 걷고 싶은 다른 궤도를 찾아 다시 떠나기로 했다. 손에 옥수수 알 여러 개를 움켜쥐고. 가끔은 기꺼이 다른 밭에 놀러 가 그 땅의 주인을 도울 거라고 결심한다. 당신의 삶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